김용태 교수님은 한국분이세요?

윤근영 기자기자 페이지

"북한 유명 과학자였던 나의 장인도 굶어죽어"…김성은 목사 인터뷰

"탈북민,삶quot난좀전에먹었으니이건아들먹어quot결국굶어죽은엄마김용태 교수님은 한국분이세요? 중국서 북송될 때 낚시바늘로 코 꿰여 줄줄이 끌려가기도"

[※ 편집자 주=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의 이번 인터뷰 기사는 두 번째입니다. 분량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키로 했고, 첫 번째 기사는 지난 21일 [삶] "내 아내 알몸 화상채팅, 생활비 벌려고 시켰는데 뭐가 문제냐"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사는 남한의 삶 등을 다룬 것으로, 다음 주 중반께 나갈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

[촬영 홍지희]

김용태 교수님은 한국분이세요?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어느 날 집에 먹을 것이 조금 생겼다. 오랫동안 굶주려 목소리에 힘도 없는 엄마와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딸에게 말했다. "우리는 좀 전에 먹었으니 이것은 너희들이 먹어라."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아이들은 허겁지겁 그걸 먹어 치웠다. 며칠 후 부부는 연이어 죽고 말았다. 9살의 오빠와 7살의 여동생은 부모의 사망이 오랫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오빠는 꽃제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아이는 그곳에서 구걸해 다시 북한 땅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집에서 울며 기다리는 어린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이다.

김용태 교수님은 한국분이세요?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는 지난 13일과 14일 연합뉴스와의 두차례 인터뷰에서 "부모는 먹을 것이 생기면 자꾸 자식들에게 주고는 끝내 굶어 죽는 일은 북한에서 흔하게 일어났다"고 했다.

김용태 교수님은 한국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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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당시에 굶어 죽은 사람은 300만명에 이른다"면서 "그 이후에도 북한의 경제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갑자기 배급이 끊기는 바람에 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많이 죽었다"면서 "다행히 이제는 주민들이 주변에 조그만 공간이 있으면 콩 하나라도 심는 등 나름대로 생존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고 했다.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군산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닌 뒤 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엔지니어로, 대기업에서 10년간 근무했다. 그는 2000년에 중국 토문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가 탈북민 구조활동에 나섰고, 지금까지 구출해서 한국에 데려온 탈북민이 1천여명에 이른다. 그는 처음으로 해상을 이용해 북한 주민 9명을 남한으로 데려왔던 인물이다.

그가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 11월에 목숨을 걸고 도운 북한 일가족 5명의 실제 탈출은 다큐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담겼다. 이 영화는 그의 현장 인도하에 탈북민이 12시간에 걸쳐 라오스 밀림을 헤쳐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해 1월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인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은 이 영화는 올해 2월 영국 아카데미(BAFTA)에서도 다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작년 10월에는 미국의 600여곳 영화관에서 개봉됐으며, 최근에 열린 미국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15편의 예비 후보에 포함됐다. 미국 공영방송 PBS는 지난 1월 9일부터 스마트TV와 웹사이트를 통해 전국에 이 영화를 내보내고 있다. 김 목사는 이 영화를 계기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 코넬 대학교 등에서 강연자로 초청받는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지난 1월31일 개봉됐고, 4월11일 재개봉될 예정이다.

탈북민 지원하다 부상을 입었을 당시 김성은 목사와 부인 박에스더 목사

[본인 제공]

-- 부인 박에스더 목사도 탈북민이라고 하던데.

▲ 나는 중국 백두산 기슭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 '성경 백독'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성경을 100번 읽으면 2천달러를 주는 이벤트였다. 아내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성경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아내는 내가 김정일 장군을 닮았다며 좋아했다. 나는 배가 나왔는데, 그런 외형이 김정일 같은 느낌을 준 듯하다.

-- 아내는 충성심이 강한 군인이었다고 하던데.

▲ 아내는 인민군 중대장 출신이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평양에 있는 김일성 동상을 한 달간 지켰던 사람이다. 굶어가면서 그렇게 했다.

-- 김일성 동상을 왜 지키나.

▲ 북한에서는 '수령님은 죽었어도 살아계신다'는 인식이 있어서 당국이 항상 보초를 선다. 다른 사람도 원하면 동상을 지키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당시에 아내는 자발적 보초를 선 사람이었다. 이런 일은 북한 사회에서 경쟁적으로 일어나는데,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그렇게 한다. 홍수나 불이 났을 때 자신은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 죽으면서도 김일성 초상화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지켰다고 해서 온 가족이 영웅 대접을 받는 사례도 있다. 박물관에 가면 그런 가족의 이야기와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 충성심이 강했던 부인이 왜 탈북하게 됐나.

▲ 아내의 아버지이자 나의 장인어른은 북한에서 유명한 과학자였다. 독일과 리비아 두 곳에서 유학한 분이었다. 전공은 미사일 엔진 쪽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분도 굶어 죽었다. 아내는 아버지 사망 후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청진의 친척 집에 갔다가 중국의 고모 집까지 찾아갔다. 소득은 없었다. 친척들도 아내를 도울 여력이 안 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모는 아내에게 한족한테 시집을 가라고 했고, 아내는 그럴 수 없다면서 고모 집을 나왔다.

-- 평양에 사는 과학자가 굶어 죽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 정확하게는 평양 근처의 과학단지인 평성에 살았다. 고난의 행군 당시에는 과학자라는 지위도 소용없었다. 당시 북한 여성에게 배우자로 인기가 있었던 남자는 농촌 총각과 운전기사였다. 정부의 식량 배급이 끊긴 상태에서 농촌 총각은 어떻게든 먹을 것을 구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운전사는 차량에 적정 인원을 초과해 태워 돈을 벌었다. 우리가 북한 사진을 보면 차량 위에 많은 사람이 타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 운전사는 이런 식으로 돈벌이를 한다.

화물열차 타고 가는 북한 주민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 주민들과 북한군들이 화물열차를 타고 중국 연변 삼합지역 두만강 건너편인 함경북도 온성군 신전리 부근을 지나고 있는 모습으로 중국 쪽에서 촬영.
[연합뉴스 사진]

-- 아내가 서울에 와서는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날 듯하다.

▲ 장인은 죽기 전에 "돼지고기에 쌀밥 한번 먹어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다. 그때 아내는 아버지에게 모진 말을 했다. "지금 죽만 먹어도 고맙고, 풀뿌리를 삶아 먹어도 감사한데, 무슨 말씀이냐"고 했다고 한다. 아내는 그런 말을 한 게 후회돼서 밥상머리에서 울곤 했다. 아내는 탈북 후 10년간 일기에 "아버지에게 미안하고, 보고 싶다"는 내용을 계속 적었다. 아내는 마트에 갔다 온 날은 특히 많이 울었다. 이렇게 흔한 쌀밥과 돼지고기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 본인의 아내는 평성에서 청진에 갔다가 중국으로 넘어갔는데, 평성에서 청진까지 가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하는데.

▲ 평성에서 청진까지 한 달 정도 걸렸다고 한다. 서울∼부산 정도의 거리인데, 북한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 열차는 전기로 움직이는데, 전력이 부족하다 보니 중간에 자꾸 멈춰 선다. 열차가 서면 사람들이 냄비 등을 들고 우르르 내려서는 눈을 녹여 강냉이죽을 지어 먹는다. 언제 출발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승객이 담배 한보루를 주면 열차는 중간에 아무 데서나 서기도 한다. 객차는 남겨두고 열차의 머리만 달려가는 일도 있는데, 북한에서는 군사 임무가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 지금도 북한의 교통 사정은 안 좋은가.

▲ 위의 교통 사례는 고난의 행군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다. 북한에는 버스가 없었는데, 혜산∼평양에 좋은 버스가 운행된다. 북한의 전주(錢主)들이 기업소의 이름으로 버스를 사서는 운행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운행되는 장거리 침대 버스도 북한에 있다. 이런 것은 우리가 확보한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숨진 것으로 보도된 '꽃제비'

뼈만 남은 처참한 몰골로 자신이 먹을 토끼풀을 뜯는 영상이 국내외 TV로 방송돼 충격을 줬던 북한의 20대 꽃제비. 이 여성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끝내 숨졌다고 이 영상을 촬영한 일본 아시아프레스 관계자가 대북 인터넷 매체 데일리NK에 밝혔다. 사진은 2010년 8월 KBS 스페셜을 통해 보도된 모습.
[KBS 화면 촬영]

-- 꽃제비의 어원은.

▲ 북한과 중국 접경지역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구걸하는 북한 아이들을 꽃제비라고 부른다. 러시아어로 '꼬체비예'는 유랑인, 떠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꽃제비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 어떤 아이들이 꽃제비가 되나,

▲ 부모 모두가 죽거나, 아버지나 어머니 한 분이 사망해서 꽃제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양친이 모두 살아 있는 꽃제비도 있다. 아버지, 어머니라고 해서 더 이상 아이를 먹여 살릴 능력이 안 되니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다. '살아남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라는 생각으로 흩어져 각자 자기 입은 자기가 건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먹을 것이 생기면 "나는 먹었어. 너 먹어"라고 하면서 자꾸 자식에게 건네고는 굶어 죽는 경우다.

-- 백두산 줄기에서도 꽃제비를 많이 만났다고 하던데.

▲ 꽃제비들이 산등성이 나무 아래에 굴을 파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가을의 벼 나락이나 옥수수 대로 안 보이게 위장해 놓고 있는데, 도와주려고 해도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으로 시작되는 김일성 장군 노래를 크게 불러준다. 그러면 토끼들이 굴속에서 나오듯이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북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이 고기다. 돼지고기를 구워주기도 했는데, 설사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닭튀김을 사다 줬다. 아이들은 중국 닭튀김을 아주 좋아한다.

-- 꽃제비들은 두만강을 건너오기도 한다는데, 위험하지 않나.

▲ 자동차 타이어 튜브를 타고 강을 건너기도 한다. 북한군 경비병은 아이들이 강을 건너는 것을 알고도 봐주는 경우가 많다. 어린 아이들은 중국에서 잡혀 북한으로 끌려와도 대체로 처벌받지 않는다. 꿀밤을 맞는 정도다. 북한군 경비병은 강을 건너는 아이들에게 '경제과제'를 주기도 한다. 구걸해서 얻은 돈으로 담배나 신발 등을 사 오도록 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코로나 사태 이전의 이야기다. 지금은 꽃제비들이 국경선을 넘을 수 없다.

초소에 모여있는 북한 군인들

2023년 2월19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일대의 한 초소에서 북한 군인들이 모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사진]

-- 본인은 두만강 변에서 북한 군인도 많이 만났다고 하던데.

▲ 두만강 상류 쪽은 강폭이 매우 좁다. 폴짝 뛰어서 건널 수 있는 정도다. 한번은 그런 곳의 북한군 초소 경비병이 신발의 밑창을 어디서 구했는지, 천으로 이걸 발에 묶어서 신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봤다. 며칠 후에 나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안전화를 그에게 선물했다. 안전화는 앞부분이 쇠로 돼 있고, 소가죽으로 둘러싸서 만든 것이어서 10년을 써도 끄떡없다. 등산화보다도 튼튼한 것이 안전화다. 그 군인은 그걸 선물로 받고는 너무 좋아했고,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번은 그에게 북한 군인들에게 무엇을 선물하면 좋은지 물었다. 추리닝(트레이닝복)이 최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추리닝은 외출할 때, 운동할 때뿐 아니라 잠잘 때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북한 군인들에게 트레이닝복을 주기 시작했다.

-- 북한 꽃제비뿐 아니라 군인들에게도 닭튀김을 줬다고 하던데.

▲ 백두산 기슭에는 북한군 초소가 띄엄띄엄 있다. 초소마다 2∼3명씩 총을 들고 보초를 선다. 올라가면서 닭튀김을 주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받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초소 근처에 통닭을 놓고 올라가게 되는데, 내려올 때 보면 통닭은 사라지고 뼈만 남아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다.

가운데 아이가 신혁 군. 양옆은 함께 탈북한 아이들. 라오스 안가에서 메콩강을 건너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뒤의 어른이 김성은 목사.

[김성은 목사 제공]

-- 본인이 신혁이라는 고아를 북한에서 데려왔는데, 그 아이는 어떻게 고아가 됐나.

▲ 엄마는 돈을 벌러 중국으로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엄마가 배신한 것으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너의 엄마 때문에 내가 이렇게 죽는다"면서 신혁이 앞에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신혁이 아버지가 오해한 것으로 본다. 배신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인신매매단에 의해 팔려 가서 연락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 신혁이를 탈북시켰는데, 구체적인 과정은.

▲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이 자기가 촬영했다면서 영상을 보여줬다. 그 영상에 신혁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당시 7살인데, 너무 왜소해서 꽃제비 무리에도 제대로 끼지 못했다. 그냥 두면 살아남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그 아이를 데려오기로 했고,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다. 북한 쪽 브로커가 두만강 변에서 신혁이를 보내고, 중국 쪽에서는 우리가 아이를 받기로 했다. 신혁이가 두만강 얼음판 위를 걸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북한 경비병에게도 미리 말해뒀다. 그런데 차질이 생겼다. 우리가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우리는 강변을 새벽까지 뒤졌으나 아이를 찾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군이 신혁을 보고 소리치자 아이가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경비병도 교체되는 바람에 사정을 몰랐다. 신혁이는 1주일 후에 다른 북한 주민과 함께 무사히 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 신혁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 13명이 같이 왔다.

-- 왜 14명으로 늘었나.

▲ 신혁이가 강을 건넌다는 것을 알게 된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같이 가자며 신혁이를 데리고 강을 건넜기에 사람 수가 늘어났다.

-- 중국 쪽에 여전히 북한 꽃제비가 많은가.

▲ 코로나 이후 국경 통제가 심해져서 거의 없다. 북한 쪽에는 아직도 많다.

유엔에서 북한의 강제노동에 대해 증언한 탈북 청소년들

탈북 청소년인 김은솔(18.왼쪽)과 전효빈(16)이 2017년 북한의 아동 노동실태를 유엔 아동인권위원회에 증언했을 때 모습. [연합뉴스 사진]

-- 북한에서는 아이들도 노동을 많이 한다고 하던데.

▲ 북한은 주로 산악지대이다 보니 건설 현장에서 큰 돌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한여름에 그 돌을 자갈로 만드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 자갈은 철도에 까는 돌로 쓰이기도 한다. 아이들은 산나물과 토끼풀을 뜯는 일도 한다. 돈 있는 집의 자식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 2017년 전효빈 양이 탈북 학생으로서 유엔에 나가 북한 아동 노동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는데.

▲ 전 양이 당시 16세였는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아동인권위원회에 출석해 북한 아동들의 노동 실태에 관해 증언했다. 북한 당국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으나 전 양은 굴복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는 한 달간 공동생활을 하면서 모내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겨울에는 산속에 들어가 오두막집을 짓고 1주일간 나무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경제과제로 토끼 가죽을 제출해야 하는데 초등학생은 3매, 중학생은 5매였다고 했다.

-- 북한 아이들이 토끼 가죽을 어디서 구하나.

▲ 그러니 집에서 토끼를 키워야 한다.

-- 다른 경제 과제는 없나,

▲ 북한에서는 인분까지 당에 바쳐야 한다. 북한에서는 인분이 비료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도 과거에는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다.

-- 전 양은 어떻게 탈북하게 됐나.

▲ 전 양의 어머니가 이미 남한에 와 있었다. 전 양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살다가 굶주린 데다 술 담배를 많이 해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북한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브로커를 통해 딸을 남한에 데려오기로 했다. 전 양은 어렵게 라오스까지 왔지만, 이 나라 당국에 붙잡혀 북송되고 말았다. 전 양은 북한 집결소에 끌려갔으나 미성년자여서 처벌 없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 아이는 할머니와 살았는데, 생활이 힘들었다고 한다. 아파서 등교하지 못하면 학교 측은 도망간 줄 알고 난리가 났고, 보위부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와서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는지 물었다고 한다. 학교 친구들은 조국을 배반한 아이라면서 상대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전 양의 어머니는 아이의 두 번째 탈북을 추진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고, 나와 전 양의 어머니는 라오스에서 아이를 만났다. 전 양은 이렇게 한국에 들어오게 됐다.

2002년 5월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진입 시도 중인 탈북자

[연합뉴스 사진]

-- 탈북민이 중국 공안에게 잡히면 어떤 조사를 받나.

▲ 공안들이 특히 관심을 갖는 것은 탈북 루트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사람을 접촉해서 탈북을 기도했는지 등이다. 이런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성폭행이 따르기도 한다.

-- 공안이 작성하는 초기 조사자료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 중국 공안한테 탈북자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가 고파 넘어온 단순 탈북자라고 공안이 서류에 적어놓으면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서 기독교를 믿었다고 하거나, 남한으로 가려 했다고 적으면 그 탈북민은 죽을 수도 있다. 북한당국이 중국 공안으로부터 탈북자와 함께 이 조사 자료를 넘겨받는데, 이 자료가 처벌 강도의 중요한 기준이다.

-- 중국에서 북한으로 끌고 갈 때 머리를 제외한 온몸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쇄골 안을 뚫어 체인으로 연결하는 '쇄골 체인'으로 줄줄이 묶어서 끌고 간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인가.

▲ 내가 그런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으니 사실 여부를 확인해줄 수 없다. 다만 나의 아내는 죽으면 죽었지, 북한으로 끌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탈북자들의 코를 낚싯바늘로 꿰어서 끌고 가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손가락 수갑이라는 것도 있다. 양손의 엄지손가락만을 모아서 작은 수갑을 채우는데, 달아나려면 손가락을 끊어야 가능하다. 현실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 탈북한 사람들이 북송되면 어떤 일을 당하나,

▲ 탈북한 사람들 대부분은 체제가 싫어서가 아니다. 배가 고파서 떠난 사람들이다. 이런 탈북민은 중국에서 인신매매단에 의해 인권유린을 당하는데, 북한 당국이 이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북한으로 끌고 와서는 폭행하고, 고문하고, 성폭행까지 한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성은 갈렙 선교회 목사

[촬영 홍지희]

-- 탈북민이 북송되면 어떤 일을 당하나.

▲ 먼저 집결소로 간다.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조사하는 곳이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라면서 폭행과 고문을 한다. 안 한 것도 했다고 해야 할 정도로 고문 강도는 세다. 조사를 마친 다음에는 탈북민이 거주했던 지역의 보위부에 데려가라고 연락하는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면 탈북자는 1년간 집결소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다. 집결소에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10평 정도의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을 집어넣고, 책상다리 자세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것이 폭행당하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다고 경험자들은 전한다.

-- 집결소 이후에는 어디로 가나.

▲ 탈북이 처음이면 노동단련대로 가지만 처음이 아니라면 교화소(교도소)로 이송될 가능성이 크다. 교화소의 다음 단계가 수용소인데, 두 가지로 나뉜다. 10∼15년이면 출소하는 일반 수용소가 있고, 평생 못 나오는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 정치범 수용소에는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

-- 북한에서는 뇌물을 쓰면 풀려날 수 있다고 하던데.

▲ 북한에도 법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있고, 재판 절차도 있다. 있는 것은 다 있는 셈이다. 그런데 뇌물을 주면 살인자도 풀려나온다. 한국에도 있는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북한에서는 훨씬 심하다.

-- 북한 주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북한 동포를 도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미약하지만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살아만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다."

(취재 지원 홍지희 인턴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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